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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양육, 도서

평신도를 깨운다 - 3부. 제자도

by HR_Archive 2024. 7. 11.

 

3. 제자도

평신도 훈련의 전략적 가치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제자들을 부르셨다. 전통적인 유대 교회 지도자처럼 마냥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찾아다니시면서 당신께서 원하는 얼마의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예수께 필요했던 것은 당신의 말씀이 그대로 인쇄되어 살아있는 교본 역할을 할 수 있는 제자들이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동안 남기신 것은 당신에게서 배운 저 무식하고 평범한 제자들 몇 사람뿐이었다. 그만큼 그분에게는 소수의 제자를 만드는 작업이 전 생애를 걸고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제자도에 대한 정의를 물으면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한다. 성경 공부 교재 또는 담당 목사님을 열심히 따르는 것 정도로 생각하거나, 어떤 단체에서 고안한 어떤 주형에 넣어서 찍어내는 제품처럼 편협하게 생각한다. 제자도를 명확하게 정의하면 내가 원하는 평신도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예수님이 대답하신 바 이다. 우리는 목회자의 눈에 보기 좋은 제자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목표와 표준을 공부하고 지켜야 한다.

 

한국을 비롯한 자유 세계의 교회는 오랫동안 예수의 제자들을 만드는 데 태만하였다. 그 결과 세속주의, 공산주의, 이단사상, 뉴에이지 운동 등 불건전한 문화가 교회 안으로 거세게 들어왔다. 제자도로 훈련된 평신도의 벽이 엷어서 교회가 막아내지 못한 결과이다. 불순한 세력이 소수의 인원을 핵심 요원으로 만드는데 엄청난 투자를 하는 동안 우리는 예수의 제자를 만드는데 너무 무관심했다

 

성경에 나타난 제자라는 개념

성경에 나오는 제자의 의미는 제자가 되다”, “제자를 만들다라는 동사의 의미가 대다수이다.

마태 : 모든 신자(교역자+평신도)는 항상 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아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음
마가 : 12명의 제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제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요한 : 2가지(광의적+협의적) 의미를 모두 사용했지만 요6:66을 보면 열두명의 사도가 아닌 상당수의 사람을 제자로 부른다.
누가 : 제자의 용어를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데 혁신적인 역할을 함.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자로 불렀다.
사도행전 : 초기에는 예수를 직접 목격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혼용(제자, 믿는자) 하였다가 결국 제자만 남았다.

 

평신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뚜렷한 목표와 표준을 제시하지 않으면 자연히 신앙생활이 위를 향하기보다는 아래로 향하기가 쉬워진다그리고 서신서에 제자를 만들라는 교훈을 찾을 수 없다고 하여 제자훈련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도 경계해야 한다. 그 당시 제자들은 예수를 철저히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믿는 자는 다 제자인가?

어떤 사람을 제자로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 처음부터 분명한 대답을 내놓고 제자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많은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무의식적으로 제자와 무리의 구분을 제자훈련 수료 유무로 나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특권의식을 심어주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일단 예수를 믿고 무리 중에서 앞으로 나온 사람이라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자훈련은 교회 안의 특공대를 만드는 과정이 아닌 예수를 닮고자 남보다 먼저 달려가기를 소원하는 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물론 영적 수준의 차이는 있을 순 있지만 중요한 점은 제자도의 길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초신자도 제자이고, 헌신자도 제자이며, 교역자도 제자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간다는, 성화의 과정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 제자이기 때문에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라는 개념 안에 있는 3가지 요소

제자라는 개념 안에는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동안 당신의 말씀과 삶의 모범으로 보여주신 3가지 요소가 들어있다. “인격적 위탁자”, “증인”, “이라는 세 가지이다.

 

1. 인격적 위탁자

구약에서는 오직 하나님만 선생이며 주님이었다. 그래서 선지자와 같은 사람은 단지 하나님이 당신의 계시를 백성에게 알리는 데 사용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지만 자신이 하나님이요, 말씀이라고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참으로 절대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선생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에 나오는 제자라는 개념은 제자로 부름 받은 자와 선생과의 인격적 연합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제자도에는 예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는 인격적 위탁이 들어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인격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합당하지 않고 했다. 심지어 누가복음에는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예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인격적 위탁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소명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가길 원하는 제자는 단번에 결단하고 행동에 옮기고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농부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까? 제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를 미리 계산하는 자라야 자신을 따를 수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치러야 할 대가 중 하나는 싸움이다. 때에 따라서는 집안 식구와의 불화도 피할 수 없다. 물론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데 가정이 걸림돌이 되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제자는 자신이 지금까지 사랑했던 욕망, 평안, 꿈 등을 다 버려야 한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는데 제자가 다른 길로 갈 수는 없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행자가 되신다는 위로를 가지고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두 번째 대가는 생명을 바치는 모험이다. 세상에서의 안전이 신앙생활의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다. 제자는 자신의 선생과 같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부름 받은 자이고 그 목적을 위해 기꺼이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명을 영원히 향유하는 길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해당 관점에서 바라보면 제자훈련은 성경 교재 몇 권 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를 전적인 위탁자로 바꾸는 해산의 진통을 겪는 과정 이다. 그리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쁨으로 예수를 본받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주님께 자기 삶을 위탁한 자다. 어떤 형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는지는 일률적으로 결론짓기 어렵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문제이다.

 

2. 복음의 증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위임한 궁극적인 일은 그 분을 증거하는 것이다. 당시에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자는 자기 생명을 잃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내적 충동이 있었고 그것은 성령이 주는 것이었다. 전도는 은사라는 주장은 타당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성령이 임하시면 누구나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1:8) 신약성경에 전도하라는 명령이 희소함에도 초대 교회가 가장 열심을 쏟았던 일이 전도하는 것과 모이는 일이었다. 이것은 성령의 내적 충동에 의한 것이라 봐야 한다. 성령의 사람에게 예수를 증거하는 일은 일종의 본능적 소산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아무 명령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증거는 전부 다 입으로 전하는 말의 전도였다. 선한 생활이 일으키는 어떤 감동이 전도에 도움은 될 수 있지만 완전한 증거가 될 수 없다. 말로 전하는 복음이 빠진 증거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대신 선하게 보이는 자기 자신을 내세울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제자훈련의 건강 여부를 진단하는 방법 중 하나는 훈련생이 복음을 전하고 싶어 얼마만큼 안달하는가를 살펴보는 데 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10:14)

 

3. 섬기는 종

신약성경은 제자도가 종으로 섬기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종(doulos)라는 명사와 섬기다(diakoneo)라는 동사는 한 쌍이 되어 자주 성경에 나타난다. 예수의 제자는 종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제자의 복은 자신이 종이며 주인보다 높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는 데 있다. 제자의 사명은 생명을 잃을 각오까지 하지 않으면 절대 완수할 수 없는 일이다. 종으로서 받은 고난은 제자도 보증서나 다름없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제자도의 직은 자원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억지로 끌려온 노예가 아니다.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과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능력을 말 속에 담아 다니지 않으시고 행동 속에 담고 계셨다.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인 것이다. 스스로 종의 몸을 입고 낮아지지 않는 곳에서는 십자가의 승리가 따라오지 않는다. 제자훈련은 교역자와 평신도 모두를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하는 성령의 사역이다. 교회의 권위는 섬기는 데서 생긴다.

 

누구든지 위탁자, 증인, 종으로서의 요소들을 인격과 삶에서 온전하게 갖출 수만 있다면 세상은 그에게서 예수님을 볼 것이다. 날마다 세상 속에서 수많은 불신자와 어울려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평신도를 위해 이것이야 말로 얼마나 절실한 사역인가.

 

교회의 체질이 바뀐다

평신도를 제자화 하겠다는 목회 철학을 지역 교회에 실제로 적용한다면 어떤 면에서 교회의 체질이 개선되는지 살펴보자.

 

먼저 교회의 이미지를 새롭게 할 수 있다. 부름받은 택자의 공동체라는 강한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자기만족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특권은 주장하나 사명을 망각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 만연하던 유대교의 고질병이었다. 지상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틀림없이 세상으로 보냄받은 예수의 제자이기도 하다. 모이는 교회의 이미지는 흩어지는 교회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영적 훈련을 받을 수 있는 학교, 일꾼들이 일하는 작업장, 십자가의 장병들의 병영, 세상에 시달린 자들의 피난저, 폭풍우를 만난 배의 등대로 기능을 하는 곳이어야 한다.

 

제자도를 통해 평신도의 자아상을 바로 정립할 수 있다. 만일 평신도가 자신을 교회의 객체로 생각한다면 언제나 교역자의 우산 아래 보호를 받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이것은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을 흔드는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만일 현대 교회 안에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제자의 정체성을 갖는다면 교회 밑바닥에서부터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교회 체질의 개선은 어떤 프로그램을 도입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도에 입각해야 한다.

 

그리고 제자도는 평신도를 교회 안에서 몸을 위해 상호 사역할 수 있는 꼭 필요한 지체로 만든다. 그리고 교회 안과 밖에서 이 상호 사역의 결실을 보도록 다양한 여건을 조성한다. 신자 상호 간의 횡적 관계는 성경이 말하는 독특한 영적 교제를 통해 발전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조직적 기능에 따른 교제, 즉 일하기 위해 얼마동안 가까워지는 그런 관계와는 그 성질이 전혀 다른 교제가 된다. 그리고 교인이 자기를 독립된 개체로 보지 않고 다른 지체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몸의 한 지체로 인식하면 교회 안에서 메마른 조직체 문제로 유발되는 갖가지 병폐를 상당 부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훈련은 평신도가 교역자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의 병적 체질을 교역자가 평신도를 위해 존재하는 건강한 체질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그것이 평신도 중심의 체제이며 결코 상하의 개념이 아니다. 훈련을 통하여 강판 평신도, 생산적인 평신도로 변화되면 교역자도 살고 평신도도 살 수 있다. 교역자 혼자서 일하는 교회와 평신도들과 함께 뛰는 교회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지속적인 교회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교회 부흥을 어떤 행사 뒤에 따라오는 결과가 아닌 교회 체질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물론 제자훈련을 성장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면 결국 변질될 것이다. 제자훈련은 평신도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교회의 이탈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걱정을 한다. 하지만 로저 핑크가 200년 사이에 반복한 미국 교회의 성장과 쇠퇴를 분석한 결과, 1960년대의 급속한 쇠퇴의 주 원인은 교인들의 눈치만 살피느라 너무 적은 것만 요구하는 목회를 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꾸준히 성장하는 건강한 교회 체질을 원한다면 제자훈련을 해야 한다. 오래지 않아 이사야가 보았던 환상이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이사야 60: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